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싸이월드 감성 꺼내기 (feat. 2009년 홍대놀이터옆 의원 카페 제너럴닥터)

2021. 1. 7.

✎ Writer_maruko

서울출생, 디자이너출신의 한국인 아내 ,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인 남편의 점심도시락을 만듭니다

싸이월드 감성 꺼내기 (feat. 2009년 홍대놀이터옆 의원 카페 제너럴닥터)

728x90
반응형

싸이월드가 나에게 노크했다. 우리시대의 싸이월드는 어떤 존재였는지 시간이 지나서도 톡톡히 보여주고 있는 , 그 언젠가는 어딘가에서 결국엔 꽁꽁숨겨뒀던 감성을 꺼내야만 하는 예정된 결과였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넓다란 사진 앨범에 비닐을 벗겨 사진을 붙여 보관했던 때와는 다르게말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시간여행을 하고있다.

그 언젠가부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디지털 사진들과 현재의 내 인생의 주인공인 음악들을 묶어 작은 앨범 공간으로 꾸려가던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처럼,

요즘 한명두명, 다시 싸이월드 미니홈페이지에 작게나마 생각과 고뇌를 기록하는 지인들이 많아지고있다.

타인으로부터의 반응은 느리거나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것이 상관 없는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누군가의 "좋아요" 가 굳이 필요하지않은 나만의 추억의 공간을 그렇게나마 계속해서 꾸려가고 싶은 것이고, 누군가 그때 그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싸이월드가 나에게 노크했다. 아니 내가 싸이월드에 노크했다.

몇일전 10여년간 나를 조종해오고, 내가 조종해왔던 페이크스위츠 라는 업을 잠시만 쉬기로 결정한뒤,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난 10여년간 내 네이버 블로그는 FAKESWEETS 공예에 대한 이름, 로고, 이미지 등이 떠난날이 단 하루도 없었더라. 개인적인 감성들을 적어내고 싶어도, 블로그의 본질을 흐리는 느낌이 들어 삭제하거나 수정하여 기록하곤했다.

그래, 처음 이 블로그를 제작했던때가 딱 10여년전 2009년이었고, 페이크스위츠 작업만을 위한 블로그를 제작하기 위함이었고, 초반에는 개인적인 취향이나 감성을 담은 게시판도 여러개 만들어봤었지만, 한우물만 파야했던 시기었다. 그렇게 나는 10여년만에, 네이버 블로그의 페이크스위츠가 메인이었던 메뉴 설정을 변경하고 , 메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지웠다. 그리고 어떤 프레임을 끼워넣을지 흥분되는 고민을 연이어 하고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지나고 , 5년이 지나고 8년이 지나고, 늘 작업하는 모습과 , 행사하는 모습을 보이던 블로그를 내 개인 이야기로 채워넣을 생각을 하니, 사탕을 막 뜯고 있는 일곱살 어린아이처럼 기쁘다. , 나는 어디서부터 불만이었던걸까.

 

 

싸이월드 감성 꺼내기 (feat. 2009년 홍대놀이터옆 의원 카페 제너럴닥터)

2009년의 나는 홍대에서 사업하는 분들 사이에서 꽤 마당발이었었고, 의류업에 종사하고있었으며, 쉬는날에는 내가 좋아하는 홍대를 새로산 캐논 450D 카메라를 가지고 누비기 바쁜, 예쁜 카페를 돌아다니며 소위말하는 "혼밥"을 일찍이 즐기던 20대 여자아이었다.

홍대에는 지금처럼 커피 체인점보다는 제너럴 닥터처럼 그 카페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넘치는 인테리어와 시스템으로 인기를 찾이하는 감성적인 카페들이 한가득이었다. 점점 돈독 오른 건물주들 투정에 못이겨 가게를 빼거나 가게가 없어지거나, 기업브랜드 회사로 갈아치워지는 현상에

이토록 소중한 공간은 계속해서 죽어갔다.

 

싸이월드 감성 꺼내기 (feat. 2009년 홍대놀이터옆 의원 카페 제너럴닥터)

 

 

 

싸이월드에 올렸었던 추억의 사진들은 픽셀이 너무나도 작기때문에 네이버 블로그에 가져오기 여간 쉽지 않은 상태였다. 햇살 가득 하던 홍대 놀이터 옆 의원 카페 "제너럴 닥터" , 차후에는 연남동으로 위치를 옮기고 2019년 현재 그 자리에는 아마도 "서셰프키친" 이 들어와 있을 것이다. (1층은 스타벅스)

현재 소식을 보니 연남동으로 옮겨 "다가구연남" 을 운영하다가 <회생식당>이라는 펍&비스트로 로 이전한다는 소식이다.

싸이월드 감성 꺼내기 (feat. 2009년 홍대놀이터옆 의원 카페 제너럴닥터)

난 2009년 이 카페에 앉아있었을 당시, 지금보다도 훨씬 마음의 여유가 충분했고, 지금보다도 훨씬 도전정신이 가득했던, 아직 때묻지 않았었던 열정적인 아이었던것만은 활실하다. 생일 전날이라 들떠있었고, 홍대는 너무나도 더웠으며, 어수선한 홍대놀이터에는 핸드메이드 마켓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지난 10여년간 홍대는 너무나 많이 변해왔다. 2009년 당시 한창 홍대에서 생활했을때 역시 선배들이 말씀하셨다 "야, 10년 20년전에는 안이랬어" 라고, 나또한 변해온 홍대에서 생활을 해왔던것이고, 지금역시 홍대는 또 변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간여행을 하게되겠지.

능숙하지 않은 사진 셔터속에 담겨져있는 그날 그계절, 그 때의 그 시간속의 내 감성들은 더이상 크게 늘리기 어려운 이 픽셀 사진 한장속에

어렴풋이 녹아들어있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게시글 작성일 2019. 1. 4. 12:26

728x90
반응형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남편과 군산 당일치기 여행 <수요미식회 군산편 참고>

2020. 9. 16.

✎ Writer_maruko

서울출생, 디자이너출신의 한국인 아내 ,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인 남편의 점심도시락을 만듭니다

일본인 남편과 군산 당일치기 여행 <수요미식회 군산편 참고>

728x90
반응형

 

 

본 게시글은 2019. 10. 25. 18:46 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최초 작성된 원본 글 입니다.

 

 

 

 

저에게 사진은요 ...

지금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정말로 간절하고 소중한 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되찾을 수 있다면 되찾고싶은,,

어눌한 기억력을 선명하게 불러일으켜세워줄 종이 한장에 기록된 그날의 그 순간의 찰나들.☺

유년시절,

제대로 짐도 못챙겨 살던 집에서 쫓기듯 나와야했을때가 있었어요. 지금이야 웃으면서 안주거리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시절은 IMF시절이라 누구든 다 힘들었을거라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감상에 젖어 자꾸 과거 이야기 꺼내며 "난 이렇게 힘든일도 겪었는데 그래서 지금 이렇게 대단하다" 라고

생색 내는걸 몹시 싫어하지만, 살다보면 어느 기로에 섰을때에 ,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어린시절의 기억들은

정말 단단하게 굳어지다못해 그렇게 하나의 나 자신이 되어버려 있음을 몇번이고 느끼게되요.

하루아침에 거주공간이 없어져 거리로 나와야했을때에,

그때 우리가족은 몇십년간 찍어 앨범에 차곡이 보관해두었던 모든 사진들을 전부다 잃어버렸었는데요.

그 이후로 몇장 안남은 사진을 겨우겨우 긇어모아, 오늘날 유일한 추억의 사진들로 보존되어있기때문에

저의 어린시절의 사진도, 가족들의 사진도 정말 거의 남아있지 않은 , 나름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진도 오로지 딱 한장.

행여나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진 뒷면엔 꼭 돌려달라는 메세지와 연락처가 기록되어있을 정도죠.

그시절 제가 잃어버린건 비단 사진뿐만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로는 누구보다 사진을 찍어 추억이라는 기록으로 남기기를 좋아하게되었고, 친구들을 만나도

유일하게 카메라를 가지고 나가거나, 핸드폰으로 바로바로 찍어서 프린팅해두는 습관이 생겨버렸습니다.

또 , 행복했던 유년시절, 아버지가 늘 비디오 캠코더를 가지고 다니시며

가족들을 찍어주셨던 기억에서 비롯된 저의 또하나의 취미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사진찍기와 영상찍기를 좋아하는 바로 저 말이죠.

 

나의 앞으로의 시절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관해두고 더이상 어린시절의 큰 상처가 되었던 그때처럼

잃어버리는것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도 동시에 큽니다. 무엇보다 사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어요.

컴퓨터에 사진 데이터야 삭제되면 그만이고, 두손에 가지고있는 사진역시 불에 타버리고 잃어버리면 그만인 것들이라,

목숨바쳐 관리를 해봐짜, 세상일은 내마음대로 되지 않을때도 있다라는걸 배워오고.

하나하나 물건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진 말자, 라고 한편으로는 언젠가부터 강하게 여겨오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인건 주기적으로 인터넷으로 찍은 사진을 집에서 사진으로 프린트 하고있다는거예요.

성향의 절반은 아날로그 인간이라, 두툼한 앨범통에 사진 끼워 넣기를 좋아합니다.

저장했던 사진들 실수로 삭제되고 그러면, 기계한테 화내는 제 자신이 좀 한심해보여서

그냥 출력해서 사진처럼 보관해둬요 .

 

 

제 인생영화중 하나는 바로 타이타닉인데요,

잭과 로즈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둘째치고, 그 영화에 나오는 대사 하나하나가 우리네들 삶속에서 되돌아볼수있는

무수한 공감력을 지늬고 있다고 느끼는 영화이기 때문이예요

 

영화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 로즈가 손녀를 향해 "네 할아버지에게도 말한적없단다(잭 이라는 존재에대해)"라고 이야기하며

마지막 배에서 선원들 앞에서 했던 말들은 늘 마음속에 멤돌아요.

But now you know there was a man named Jack Dawson...

하지만 이제 당신들을 잭도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라는걸 알게되었어요.

.....and that he saved me,

그리고 그가 날 구해줬다라는것을

in every way that a person can be saved.

사람을 구할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I don't even have a picture of him.

나는 그의 사진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He exist now only in my memory.

그는 지금 내 기억속에만 존재해요

.

.

라고 이야기하며 슬퍼 고개를 떨구던 장면.

자신의 영혼을 구해준 잭을 사람들에게 마음의 보물함을 열어

이야기해주던 장면.

 

 

 

 

 

제 인생의 엔딩 역시 이 영화 같기를 , 극장에서 개봉한 타이타닉을 보던 중학생때,

저는 곧바로 느끼고있었어요. (갑자기 감성 폭발 ㅠㅠ)

언제나 저의 아름답고 찬란했던 어린시절의 기억들은

사진 한장 가지고 있지 못한채로,

제 머릿속의 기억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죠.

기억력이 좋아 88년도때의 기억까지 선명하게 가지고 있는 저에게

그 경험의 슬픔과 애절함을 왠지 늘 되새기게 해주는 영화의 대사라고 느껴요.

어쨌던 나 자신과의 약속은 오늘날까지 실천을 하고있고,

남편과 어딜 어떻게 나가든, 한손에는 꼭 카메라를 쥐고있습니다.

 

 

 

 

군산에 가는 방법

저희는 무궁화 열차편으로

수원>군산역 행을 선택했어요.

저희는 일본으로 이주오기 바로 전까지, 함께 동탄에서 거주하며 신혼 생활을 시작 했었습니다.

처음 동탄에 살게될때에도, 서울집과 정말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시골에 나와 사는 기분이었지만은

한국은 정말 빠른 시간안에 현대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라는것을 저만 새카맣게 모르고 있었지요.

남편을 만나며 , 정말 옛~날에는 고속버스를 타야만 겨우 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아산, 천안 등은.

동탄에 살고있는 저희로써는 서울에 계신분들보다는 쉽게 다다를 수 있는 곳이 되기도 했었어요.

그리고 샤넬 콜라보 행사로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었을때에도, 동탄에 살고있는것이 서울에 사는것보다는

동선상 굉장히 편리한점이 많았죠 (웃음)

사실 남편이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던 4년반동안의 절반정도는 동탄으로오기 전에 아산쪽에 있기도 했었는데요.

덕분에 공기좋고 각 계절마다의 향내음이 그윽한 동네에서 살면서

지금생각해보면 가나자와에 오기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였나, 라는 생각 까지 들기도해요.

그러던 어느날, 매섭게 추웠던 주말 아침,

거실 가득 드리우는 햇살속에서 간접 일광욕을 하며 아침일찍 수요미식회 재방송을 보고있었어요.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군산편의 방송을 남편이 보고, 당일치기로 다녀올까? 라는 제안을 하게되었죠.

남편은 회사를 이미 그만두기로 정한 상태였고, 정해진 날까지 마무리하며 근무하는 때였기때문에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좀더 한국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고해요.

현재까지도 한국여행으로 동해바다는 꼭 가자 라고 이야기하고있는 남편이예요. 😏

저희는 무궁화호를 타고 군산역까지 직행하기 위해서 서동탄역에서 1호선을 타고 수원역까지 가서

수원역에서 무궁화열차 티켓을 끊어서 그대로 군산행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어쩌다보니 맞추게 되었던 핸드폰 케이스 샷 한번 찍어보기도하구요,

열차 안에서 먹는 편의점 밥도 어찌나 맛있던지, 바깥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밥 한입 풍경 한입 ,

냠냠

무궁화호를 정말 몇십년만에 타보는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어린시절의 기억이라, 아기때 기억이라 말이죠.

88년도에 제가 3살이었을때 거실 테이블 아래에서 TV로보이는 굴렁쇠 소년을 보고 손뼉치며 좋아라하던 모습은 기억하지만,

아주 어렴풋 무궁화호 안에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던 아기때의 제 감정이 올라오는 듯 했어요 (웃음)

이렇게 핸드폰 충전하는 곳도 있구요. 덕분에 간당간당했던 핸드폰 충전을 완료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무궁화호는 인생에서 거의 2번째로 타볼 정도로 마주할 기회를 만들질 않았던, 성인이 되어서도 열차한번 제대로 못타본

빡빡한 삶을 살아 온건 아닌가, 싶었구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편리한 시설로 바뀐거 아니겠나, 생각해봅니다.

이 사진 한장으로, 군산역에 내렸을때의 이미지가 확- 떠올랐어요.

화물 수송의 거점 답게 , 수많은 컨테이너가 쌓여있는 모습을,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확인 할 수 있었거든요.

저희는 가장먼저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수요미식회 방송에서 나왔었던 동네와 가까운 곳을 찾았어요.

바로 진포해양테마공원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한국사람이지만 군산에 대한 역사는 알고있어도 실제로 찾아가본적이없었거든요.

즐겨 찾는 프로그램에 음식 소개 등으로 나온 방송을 본 계기로나마 이렇게 군산 땅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게 감격스러웠습니다.

정말 추운날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아쉬운점이, 현재에도 검색이되는 군산의 알짜배기 정보 등을 좀더 세심하게 찾아보고 가지 못한점이

무척이나 매우 아쉬운 점이라는 것입니다.

급하게 TV로 흘러나오는 방송을 보면서 갑작스럽게 옷입고 좀 찍어바르고 가방 챙겨 나온 케이스라

최대한 핸드폰으로 검색하면서 봐야할 곳 등등을 체크해가며 이동하긴 했지만은 넘나 역부족인거 🤣

기회가 된다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 내년에라도 다시한번 춥지않은 계절에 제대로 군산을 다시한번 방문해보고싶은 마음이예요.

수요미식회의 힘 때문인지, 최근에 사람들의 방문이 확- 늘어났다는 택시 운전사 아저씨의 말씀.

자신도 깜짝 놀랐다면서, 오히려 저희에게 가보면 좋을법한곳, 그리고 저기서부터 움직여서 저기까지 가는게 좋다. 라며

감사하게도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셨었어요.

 

 

진포 해양공원

진포대첩

1380년(우왕6년) 월, 5백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에 침입한 왜구 등을

고려의 수군이 격퇴한 역사적인 사건

1만명 이상의 정예 병력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하여 묶어놓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한 다음

대부대를 거느리고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함

이들 왜구의 야만적인 약탈로 인하여 우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으며,

약탈한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흘린 쌀이

한자 두께가 넘게 땅에 수북이 흐렀을 만큼 그 피해가 매우 컸다고[고려사]는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전함

이들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나선 고려의 지휘 사령보는

해도원수 "니세"와 심덕부 그리고 "최무선" 이었음

이들은 전함 1백척을 거느리고 진포에서 왜구를 공략,

이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를 사용,

함포사격을 통해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진포해전"은 세계 해전사에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으며, 화력 기동 전술과

해상 포격전의 시초를 열어놓은 역사적인 해전이었으며,

이곳 군산의 현장에서 있었던 해전에서의 빛나는 승리로

그토록 오랫동안 고려를 괴롭혀 왔던 해적 집단 왜구의 기세는 마침내 꺾이게 됨.

고려말, 최무선 장군이 함포를 만들어 왜선을 500여척이나 물리쳤던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에 개관한 해양공원.

갯벌쪽으로 쭉- 이동을 하니 엄청 큰 배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위봉함676호.

그리고 그 앞에는 용산에 있는 전쟁 기념관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과 비슷한 분위기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군대 장비 13종16대가 전시 되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위봉함

위봉함 이라는 함정은 1945년 1월 16일 미국에서 LST849함으로 건조되어 제 2차 세계대전때

연합군의 상륙작전 등에 참전한 군함입니다.

1959년 1월 13일 미국으로부터 인수되어 LST676위봉함으로써 명명된 후

대한민국의 주력 상륙함으로써 상륙작전과 수송작전을 수행 하였습니다.

1965년부터는 월남전의 백구부대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하였고

지난 48년간 전투 활동과 해군 사관생도와 해군 장병들의 훈련 및 실습 활동 지원을 통하여

국토 방위 등 대한민국 해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2006년 12월 31일 명예롭게 퇴역한 함정.

월남전 등에 투입되기도했었던 위봉함 676은 입장료를 내고 내부에 들어가 여러가지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데

저희는 입장은 하지 않고, 밖에 전시된 해군함정, 장갑차, 자주포, 전투기 등

나라를 지키기위해 최일선에서 활동하다가 퇴역한 육군, 해군, 공군 장비들을 관람하였어요.

너무나 눈에 띄었던 건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서태지와아이들이 발해를 꿈꾸며 라는 뮤직비디오를

찍기라도 한것 같은 분위기의 , 큰 태극기가 절반정도 새겨진 폐허가 된 건물이 눈에 들어왔어요.

큰 두채의 건물이 나란히 존재했는데, 이곳 주소는 군산시 해망로 196번지. 상호명 자체가 바로 이 지번인 196 이었습니다.

이 태극기가 절반정도 새겨진 건물은 2개의 건물중 좌측에 있는 건물이었고, 일제 강점기 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고해요.

군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일본식 창고 건물이자, 우리나라에는 군산과 부산, 인천에만 남아 형태를 보존 하고 있다고.

그리고 오른쪽에 보였던 현대식 건물엔 갤러리와 카페가 자리하고있습니다. 그 앞엔

핫 스팟인 매우 큰 우체통이 있지요.

[장미동 구 일본인 창고] -위 사진 참고

1930년대 중본삼길랑 소유의 "중본상점" 건물로 시멘트, 적벽돌 콘크리트로 지은 2층 창고건물.

주로 페인트, 선구, 철물 등을 판매하였고, 해방 후 정부 소유의 적산 건물로 관리됨.

1956년 이용구씨가 현 위치에 호남제분 공장(동아원 그룹의 모태기업)을 설립하고

밀가루를 생산.

이때 호남제분관사로 매입한 건물이 바로 일명 신흥동 일본식 가옥

(등록문화재13호, 히로쓰 가옥)임.

1972년, 상호를 한국제분으로 변경. 목포시로 이전함.

이후 한국제분, 제일산업, 제일사료, 동아제분, 동아에스에프, 동아원 등으로

상호가 바뀌면서 군산시 산업발전에 기여함.

최근에는 식품 대리점 창고로 사용하던 이곳을 2015년 (유) 은파기업

(대표:김성수)이 인수 현재에 이름.

 

 

두개의 건물 사이에있었던 엄청 큰 우편함에서는 왠지모르게 사진 한번 찍고싶었지만,

꺄르르 웃으며 즐겁게 사진찍고있는 분들을 뒤로하고, 저희는 그 옆에있는

돌 하루방에서 사진을 찍어봅니다.

 

정말 너무나 추웠던 날.

 

 

 

 

군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옛 군산세관 본관

대한제국1908년에 만들어졌고 당시 이야기에 따르면 불란서 사람, 혹은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건축 했다는 설이 있어요. (건물 앞쪽 벽면에 보이는 붉은 벽돌위치)

군산 세관은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 건물만 이렇게 남아서

많은 관광객분들을 마주하고 있었어요.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써, 현재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있습니다.

1905년 깅ㄹ어가던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제 1차 군산항 축항공사기간( 1905~1910)중인

1908년(순종2년) 6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서양식 단층 건물로 건평은 약 69평이었다고해요.

붉은 벽돌과 건축 자재를 수입하여 건축되었고, 건물의 지붕은 고딕양식, 창문은 로마네스크양식,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 낸 것은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 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군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초원 사진관,

바로 제가 중학생때 엄청난 붐이 일어났던 영화인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 장소이기도 하구요.

사진관이 보일랑 말랑한 모퉁이를 돌기 직전부터, 쫙~ 늘어져있는 사람들을 볼수가 있었는데요,

기념 사진 찍으러 오신 분들끼리 협력하셔서 한줄로 차례대로 줄을 서서 사진 찍는 모습이 굉장히 보기 좋았어요.

저희 남편은 이 영화에대해서 알리가 없지여. DVD라도 사서 보여줘야 이해가 빠를 것 같았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 제작진들 비하인드 스토리가, 세트장 만들어서 촬영하는것은 배제하기로 하고,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다니면서 괜찮은 촬영장소를 발품을 팔아 찾아다니는데,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했던 와중에 잠시 쉬러들어간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여름날의 나무그림자가 꽤 괜찮게 드리워진 차고를 발견 했다고해요.

주인에게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서 사진관으로 개조하게 된게 초원 사진관이 만들어지게된 계기입니다.

"초원사진관"이라는 이름은, 주여배우인 한석규씨가 어린시절 살던동네의 사진관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 일담은 유명하지여.

😊

영화 촬영뒤, 주인과의 약속대로 철거했다가, 이후 군산시에서 관광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복원했다고해요.

추원사진관 안에는 영화속 사진기, 선풍기, 앨범, 소파 등등 사용되었던 소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구요

극중에서 가족 사진을 찍는 이들 가운데는 일부는 엑스트라가 아닌 실제 방문객이었다고합니다.

더 재밌는 에피소드는 , 크리스마스 장면에 눈대신에 사용했던 소금을, 촬영후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중에 김장때 쓰기로하고 가져가셔서 제작진들이 청소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고합니다 ㅎㅎㅎ

한국사람으로써는 이 영화가 개봉했던 시절의 년도, 계절 등등으로

아.. 그때 나는. 이라며 동시대를 살아온 기억의 흔적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어 공감대가 형성되는데요.

남편과는 살짝 그런것이 없어서 괜히 제가 미안해졌어요.

이렇게까지 직접 와서 보기까지 했으니 정말로 OST라도 틀어주고 영화를 꼭 보여주고싶은 마음이

커요. 🤎

 

요런곳 또 지나칠리가 없는 80년대생 마루짱이지요.

초원 사진관을 향하던 중, 건너편에 눈에 확- 들어온 옛날 과자 가게. 인사동에있는 곳 빼고는 딱히 발견하기 어려워서

한번 들어가면 잔뜩 사가지고 나오는 것은 어쩔수없는 추억팔이 소녀인가봅니다.

초등학생때, 그리고 고딩때까지 참 많이도 먹었었던 맥주캔디와 손바닥 캔디.

맥주는 먹어본적도없는 나이에 , 이게 맥주맛인가봉가봉가 하면서 쪽쪽 맛있게도 먹던 맥주캔디는

흰 거품 부분에 혓바닥을 대고 있으면 자글자글 지글지글 끓는 듯한 느낌이 드는것은 다 아실거예요. ㅋ

빨간색과 핑크색이 반반 섞인 체리맛의 손바닥 사탕을 종종 혓바닥을 때리면서 친구와 수다떨던

그리운 그시절.... 😉 (여기 저와함께 손바닥 사탕으로 혓바닥 치시던 조상님들 계신가요???ㅋㅋ)

다 먹고도 빨대 부분은 계속 입에 질겅질겅 물고 있기도 했었죠.

일본어를 하는 남편을 보더니, 일본인이냐며 이 동네에 유명한 일본 여성분이 살고있는데,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라며 반가움을 표해주셨어요.

와, 어느 지역엘 가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각자의 국민들이 다양한 지역에서 살고있는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아침도 대충 열차 안에서 김밥으로 간단히 떼우며 온 터,

계속해서 걸어다니고 해서 커피한잔이라도, 아니 밥이라도 먹어야겠다고 했는데 왠지 삼천포로 빠져 걸어온

싸- 한 느낌.

그 싸- 한 느낌 그대로 싣고 우연히 향하게 된곳이 바로 군산시 횟집 단지였습니다.

군산시 횟집단지가 사실 저희가 관광하던 곳에서 좀 떨어진 곳이예요.

저희는 걷는걸 좋아해서 아무 정보도없이 노량진 수산시장 같은 모습을 떠올리고 걸어갔는데,

사실 문도 다 닫혀있고, 존재하는 가게도 많이 보이지도않았고, 날이 날이여서 그런지

너무 춥고 배고프고. 그렇게 겨우 간추려서 기대에 부풀어 모처럼 값나가는 세트를 주문했더니.

그날 광어회 먹고 처음 설사 했죠.

큰 쇼크였습니다

 

죄송하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은 정말 최악이고 엉망이예요.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1년도 안된 사이에 크게 변했을것 같진 않군요.

가게 벽면에 연예인"XXX가 선정한 맛집" 이라고 적혀있긴 했지만 왠만한건 요즘 시대에 어그로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직접 제 입에 넣어보지 않는한은 섣불리 판단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포스팅을 기록하면서

갑자기 지난 기억이 떠올라 갑자기 심~ 한 빡침이......?

주문한 금액에 비해서 사이드가 너무나 많기도했지만 맛있진 않았고,

한점 두점 먹으면서 서비스도 엉망이고 이돈내고 이렇게까지 눈치보며 먹어야하나 싶은 집은 사실 처음이었거든요.

생선에서는 철 수세미가 나오기도하고 ;; 좋게좋게 하려고 다음부턴 좀 조심해 달라고 이야기를 했지만은

오히려 큰소리 땅땅치시며 그냥 다시 가져다 주겠으니 먹으라며 , 인터넷에 쓰는글이라고 저한테 이익이되게 쓰는 글이 아니라,

함께 있던 남편도 정말 보살로 유명한 인물이지만은 그날은 이해가 안가는지 얼굴이 빨개져 말이없더라구요.

 

아니요, 배부르니 안가져다주셔도되요, 하니 나중에 밉보이기 싫으신건지 억어지로 테이블에 내두시는데.

저희가 그 철 수세미를 먹고 막말로 병원에라도 실려가야 죄송하다는 말씀들을 하시려나 싶었습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건, 이렇게 샛노란 색의 광어살은 처음 먹어봅니다.

아마 서울이었다면 테이블 뒤집어 엎었을텐데, 모처럼 군산까지와서 내가 선택한 집인데.. 걍 먹어야지 ... 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먹고있었는데, 날라온 두번째 킥.

서빙할때부터 살얼음으로 반짝이던 회 조각. 🤣😅

그리고 남편과 빵 터졌던것은 참치살이었나? 자세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회조각을 씹는데

아직 딱딱하게 굳어있는 아이스크림을 씹는 것처럼

표면에 살얼음이 남아 희고 빤짝이던 냉동 살 조각이 테이블에 그대로 나왔다는 거예요.

 

네, 그냥 다 제 잘못이에요.

그 가게에 들어간 제 잘못이고, 그날 제가 운이 없었던것입니다.

남편에게는 그 가게 이미지 하나로 군산 회의 이미지가 확- 다운되어버렸어요.

그냥 수요미식회에서 소개한 집이나 갈껄.

죄송하지만 군산에서는 회 안먹을 것 같아요. 아님 더 맛있는 집을 찾아서 그곳에서

기억 교환 하겠습니다.

오전 6~7시정도에 여행을 계획하고, 곧바로 티켓을 핸드폰으로 구매해두고서

수원역에서 티켓을 출력하고 그대로 열차로 올라 둘만의 당일치기 여행에 성공했던 지난 1월 말.

당일 치기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정보로, 집을 나선 하루 일정이었지만,

그리고, 수요미식회를 보고 출발을 서둘렀다고 하기에는, 수요미식회에서 추천해준 군산 맛집 등의 정보 자체도

참고하지않고 무작정 열차에 올랐지만 

그렇게라도 군산으로 이동하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고 , 보고, 느끼고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그날 오전에 집에서 가습기를 틀어두고 커피만 마시는 일요일의 주말을 시작했더라면

전혀 마주볼수없었을 하루 일과였다는것을 너무나 잘 알아요 .

다녀와서 인터넷에 군산에 대해서 더 검색을 해보니,다녀온곳보다 못가본곳이 훨씬 넘나 많은것,

충분한 정보없이 너무 빨리 다녀온 것 같아서, 후회되고 군산에게 미안해요.

다음에 방문할때에는 좀더 자세하게 공부한 정보를 토대로 남편에게 더더욱  특별한 기억을 선물해주고싶어요.

함께여서 즐거운 하루였어요.

728x90
반응형
  • 안녕하세요 참작가티입니다~ 오늘도 글 잘 보고 갑니다 늘유용한 정보주셔서 감사해요 ღ'ᴗ'ღ

    Favicon of https://ccclsrn.tistory.com BlogIcon 티참작가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위해 나고야에 다녀왔어요 (나고야 대한민국총영사관)

2020. 4. 5.

✎ Writer_maruko

서울출생, 디자이너출신의 한국인 아내 ,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인 남편의 점심도시락을 만듭니다

제21대 국회의원선거를 위해 나고야에 다녀왔어요 (나고야 대한민국총영사관)

728x90
반응형

 

대한민국 국민으로써의 소중한 한표

대한민국 제 21대 국회의원 재외선거 신고,신청기가 2017.03.31. ~ 2020.02.15.

재외선거 투표기간 2020.04.01. ~ 2020.04.06.

 


요즘에는 유튜브 채널을 관리하느라 몸소 움직이며 영상물을 만들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는데에 행동하고 있기때문에, 노트북을 켜두고 내 머릿속의 생각이나 사상을 의자에 앉아 글로 적어내는데에는 좀 둔감해진 것 같습니다. 때때로 많은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와도, 그 기분들은 금방금방 사라져버려, 감정적인것들을 글로 옮기지 않고 몸을 빠르게 생활하는데에 익숙해져 이것은 아주 큰 장점이라고 여겨지고 있어요. 

 

저의 소중한 감성들이 금새 금새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해서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나이타령" 을 하게끔 만드는 대한민국의 뿌리박힌 시선 속에서 생활하며 나역시 자라온 편견들에서 벗어나기위해 나이를 판가름하는 숫자들은 매년 올라가더라도

제가 눈을 뜨고 있는 이 시야의 모든것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을 바라보는 감성들을 되살려보자면 나는 아직도 꿈많고 할것이 많고 하고싶은것이 수두룩한 욕심 많은 한 사람이네요.

 

 

 

 

 

지난 2월초,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통해 , 재외선거/국외부제자 투표신청을 완료하고, 요 몇주간 이메일을 통해서 투표방법과 관련 정보등을  받아보고 있었습니다. 위의 이미지처럼의 안내와 텍스트 문서로 별도의 알림 메일이 따로 왔더라구요. 

 

일본에 나와 투표신청을 하는것은 처음이었고, 기존에 한국의 공공기관등을 SNS나 컴퓨터에 수시로 팔로우/책갈피를 해두며 주시하며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더군다나 내가 뽑은 분께서 이나라의 대통령이 되시고, 나라의 많은것들이 변화하기 시작하고🥰 타향살이를 하며 나랏일에 더더욱 관심이 서고 애틋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써, 이번을 비롯해 앞으로의 한국의 선거는 어떻게해서든 참여하겠노라고 다짐했었던 결실을 맺었던 좋은 경험의 하루였습니다.

 

 

 

 

⠀⠀⠀⠀⠀⠀⠀ ⠀⠀⠀⠀⠀

 

 

 

생애 첫 나고야,

하지만 투표만 하고 깔끔하게 돌아오다.

 

 

남편과 오전 일찍부터 자동차에 기름을 넉넉히 채우고 3시간 남칫한 거리로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해 도착할 수 있는 나고야에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어림잡아 수백키로미터를 달려 편도만 ETC카드 편도7천엔이 안되는 통행료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이번달 자동차 연료비는 모두 남편에게 지불한 상태였지만, 오늘은 한국인 아내를 위해 고맙게도 대신 운전대를 잡아주어 아내의 나라의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인 아내가 잘 참여할 수 있도록 시간을 투자해주는 감사함을위해 😆자동차 기름값을 한번 더 제공해드렸습니다.ㅋㅋ

 

그래도 자가용으로 시댁에 왕복으로 이틀간 1,000킬로미터를 움직여 다녀온 경험을 하고 나니, 남편도 저도 나고야쯤이야 그닥 힘들지도 않은것, 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웃음) 중간에 쉬지도않고 휴게소도 들리지않고 도착한 나고야.

제인생에 나고야라는 이름은 매번 마트에서 판매되는 아이치현산 식자재나 야채들로 경험했던 것 뿐이며 도로 표지판에 적혀있던 "名古屋”라는 글자는 두눈으로 처음 보는 인생 첫 경험이었습니다. 

 

고속도로가 끝나갈 무렵이었나, 저만치 높은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간 가나자와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높은 건물들은 마치 마포대교에서 바라보던 합정 메세나폴리스 빌딩과도 같았던 모습들에 잠시나마 "여긴 서울이다.. 나는 지금 한강을 건너고 있다..." 라고 착각이라도 해보자 라며 잠깐 한국에 돌아온 느낌을 만끽하게도 했었습니다. 

 

저희가 방문할 예정이었던 대한민국 제 21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참여가 진행되는 나고야 대한민국 총 영사관은 나고야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남편 말로는 실제로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지하철로 좀더 들어가야하는 사카에라고 하던데

 

 

 

 

 

 

 

아시다시피 요즘 나고야역시 확진자수가 많은 TOP지역중 한곳이기애 정말 밥도 안먹고 투표만 하고 다시 가나자와로 돌아올 참이었어요.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처럼, 높은 빌딩들을 보고 여기저기 누비며 아이쇼핑도 하고 구경도하고 바깥지역 공기좀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나의 목적은 투표를 하러 온것이고. 그리고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정말 야바이한 일본의 나고야에 왔다는것.

 

 

 

 

 

가나자와는 비자를 갱신하러 갈때에도, "나고야입국관리국 가나자와 출장소"로 가야하기때문에 이시카와현에서 대한민국 총 영사관은 존재할리가 없으며 이 나고야 입국 관리국은 아이치현,미에현,시즈오카현,기후현,후쿠이현,도야마현,이시카와현을 관할하여 8개의 출장소로 구성되고 있어 정말 진득한 느낌이란 털끝만큼도 느낄 수 없는 냉정함이 묻어났어요. 볼일만 보고 나가는 느낌.

 

그냥 뭔가 모르게, 나고야에있는 대한민국 총 영사관에 도착했을때에, 무궁화마크와 더불어 한글로 적혀진 우리나라말이 멋있게 붙어있는 모습은 가나자와에서 볼수가 없다는 안타까움과 같은 것이 이번 나고야 방문에서 조금 느껴지더군요. 부럽기두 했고요 😀

 

아무튼 나고야 대한민국 총 영사관 바로 근처에있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맑은 햇살을 맞으며 저벅저벅 남편과 100미터 남칫 떨어진 영사관으로 직행합니다. 어디지 어디지 하다가 주변에 경찰들이 하나 둘 서있는 모습을 보다보니 아마도 저곳일거라고 생각했고

멋진 해태의 석상과 함께 축 늘어져 예쁜 꽃을 피우고있는 벚꽃이 있는 건물 앞으로 다가가니, 사랑스러운 글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슴뛰는 글자들. 귀에 낯익은 한국어 소리들이 들리며 마음은 좀더 쿵쾅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으로 이주한지 1년이며 그간 제대로 한국말이 귀에 들린적도 없었던 세상에서 떨어진 지역에 와 한꺼번에 들리는 한국말에 큰 감동을 느꼈어요.

 

그리고 투표 현장에서 일하고계시던 많은 한국분들이. 아무래도 타지에 나와 살고있는 상황이다보니 같은 민족이자 같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환하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하나부터 끝까지 대해주시는 모습에 크게 감동하고 정말 눈물이 날 것 같더라구요. 

이게 바로 타향살이에서 느낄수 있는 감정이구나.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하구나. 정말 그간 내색하지 못했던 불편함이 싹다 사그러지는 듯한 순간들이었지요. 

 

1층 로비쪽으로 들어가면, 한분이 서계셔서 손을 소독해주시고 그리고 라텍스 장갑 착용을 안내해주십니다. 투표는 안하지만 바로앞까지 따라들어갈 수 있다고 안내를 받아 남편도 손을 소독을 하고 함께 들어갔어요. 남편이 한국분께 아무렇지도않게 "여기 화장실 어디있어요?" 라고 물어봐서 직원분이 깜짝 놀라시며 어쩜 이리 한국말 잘하시냐며, ☺️

 

그래도 나름 한국에서 4년넘게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자격증까지 따가며 생활했던 한국말의 여운이 한국에 있을때보다 일본에 와서 함께살면서 더많은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안비밀 ☺️ㅎ

 

한템포 안으로 더 들어가서 노트북 앞에 앉아계신 분께 재류카드를 드리고 한국 주소를 확인한뒤, 봉투와 종이 2장을 받습니다. 짧은 한장과 긴 한장. 그리고 더도말고 덜도말고 계산없이 스템프를 콩, 콩, 두번 찍어냅니다. 

잉크가 다른곳에 겹쳐 찍힐까봐 손으로 휘휘 져어가며 잉크가 잘 말랐는지 두번 세번 확인을 하고, 그래도 잉크가 다른 칸에 겹치지 않도록 

조심히 접어 봉투에 정성스럽게 넣습니다.

 

대통령 선거때도 얼마나 기도하고 조심해하며 두번세번 확인하고 또 했었던지.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써 염원을 담아 밖으로 나가 통 안에 봉투를 넣습니다. 

 

"잘 도착하거라!" 라고 이야기하던 말에 근무하시던 분이 웃으시더라구요. "잘 도착할거예요! " 라면서 말이예요. 🙂

 

 

 

 

728x90
반응형
  • 마루코님!오랜만에 블로그에 왔어요ㅎ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마우스 커서를 따라 반짝이가 별을 뿌리며 떨어져서 한참을 봤어요.
    뭔가 예전에 컴퓨터랑 블로그 꾸밀 때 하던 마우스커서가 생각났지뭐예요 ㅎㅎㅎ그때는 마우스 커서를 하트로 꾸미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말이예요 ㅎ
    이런 작은거 하나에서 추억여행을 했습니다 ㅎ 감사합니다!

    요즘 이래저래 마음이 시끄러운데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아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리브
    • 2020.05.20 11:04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인남편과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러

2020. 2. 20.

✎ Writer_maruko

서울출생, 디자이너출신의 한국인 아내 ,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인 남편의 점심도시락을 만듭니다

일본인남편과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러

728x90
반응형

 

 

 

 

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1461차 "평화의 소녀상이 빛나던날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벌써 눈깜짝 할 사이에 2020년 새해의 2월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늘 새해의 기분은 이런식이었던 것 같아요. 해피뉴이얼~ 이라고 종각역 보신각종 타종행사를 보던 그 자정 무렵의 신선함이 무색할 정도로 벌써 1월말, 그리고 곧 벌써 2월 말이 될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저의  SNS공간에 대한 계획도 머릿속에서 발빠르게 바뀌어나가 새로운 블로그의 새로운 공간을 선택해 머릿속의 생각을 옮겨 담을 것을 다짐했고, 절대 손대지 않을 줄 알았던 유튜브의 채널을 본격적으로 운영해나가며 어떤 한편으로는 또한번 새로운 도전을 내밀며 2020년 한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살고있는 나라는 꽤 정신이 없습니다. 난 일본인이 아니지만 국민이 자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의 공기가 내 머릿속과 몸을 감싼 느낌은 한국의 수년전 상황과 데자뷰되며 섬뜩하기까지합니다. 외국인으로써 비자를 받고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내몸은 내가 지켜야해" 라는 생각이 좀더 강하고 절실해집니다. 일본인들에겐 그나마 "나라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라는 회피섞인 언제나 싸늘한 반응인 사람들이라 그들의 정신에는 다행인건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모습들도 최근엔 차차 변화하고 있는것 또한 사실입니다.

 

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마루짱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 라고 이야기하던 그 수많던 일본 친구들과도 나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하지 않게되었습니다, 한번 내뱉는 말로는 이곳의 국민성을 감히 이야기하기가 참담하기까지 하여 한국에서 들려오는 좋은 소식들을 들으며 그나마 일본 생활에 힘을 내고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으며 한국인인 제 덕분에 한국의 상황도 더 잘 알게될 수 있고, 또 자신의 한국 사회 경험을 토대로도 일본에 매일 나오다싶이 쏟아지는 편파적인 거짓방송 등에도 남편이 꿈쩍하지 않는 것일지도요.

 

몇일전 오전의 국민적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ZIP 에서는 일본 핸드폰 브랜드의 새 모델 출시를 홍보하며 영상화면 맨 마지막 수 초동안 삼성 갤럭시 제품을 내보냈기도 했고, 남편과 저는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지난 2019년 연말부터 올해 연초까지 , 저는 친정이있는 서울에 일본인 남편과 함께 머물렀었습니다. 아직 풀지 못한 많은 사진들을 보고있자니, 어서 분발해서 새 블로그에 글을 적어 내려가야할 것 같네요 

 

이전에는 친정에서 잠을 자며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남편과의 서울 스케줄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남편에게 부담을 덜어주기위해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호텔을 숙박장소로 잡아내고 지난 2019년 여름에 방문하지 못했던 곳들을 방문하며 남편에게 한국의 역사를 알려주고 저역시 몰랐던 사실을 배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리 상냥하고 착하디 착한 나의 친정 식구들이라고해도 남편에겐 장모님의 존재이기때문에 남편이 긴장하지 않도록 프리덤을 건내고 싶었어요 (웃음)

 

친정에서도 진득하니 시간을 보내며 오랜만에 한국 방송들도 보고 엄마랑 할머니랑 남편이랑 넷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울고 떠들고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르겠어요 🙂저보다 사위를 더 예뻐해주셔서 저는 찬밥신세쓰~ㅎㅎ

 

친정에 방문한것은 신정즈음이었기 때문에, 이미 남편과 함께 김구선생님의 서거장소를 다녀온 터였고, 오마이뉴스의 김종훈 기자님을 뵙고 임정로드4000km 책을 선물 받은 등,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방문한 뒤였고 그러한 일상들을 외할머니께 말씀드리니 한참을 듣고 계시다가 눈가가 촉촉해지신채 저에게 단 한마디를 건내셨죠 

 

 

 

"우리 손녀 애국자네.."

 

 

⠀⠀⠀⠀⠀⠀⠀ ⠀⠀⠀⠀⠀⠀⠀

사실 일제 강점기 시대였던 1910년 부터 45년까지,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광복할때 무렵의 저희 할머니께서 8세의 꼬마 아이었던 시절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외할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와 결혼하실때까지 거의 종로쪽에 살고계셨던 것 같습니다. 옛날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애 저도 이것저것 물어본적이 없어 요즘처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또한 아마 할머니의 인생에서 처음이실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라는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꾹 닫고 혼자만의 세상에서 지내기를 좋아하던 아이었거든요. 

 

살갑게 웃으며 이야기한적도 아버지덕에 잠시나마 부유하게 살았던 유년시절 이외에는 중학생시절 터진 IMF로인해 갑자기 변해버린 생활의 모든것들에 더더욱 마음의 문을 꾹 걸어잠그고 그것이 열리게 되기까지 20년 이상이 걸리기도했었습니다. 

 

어떻게하다보니 당신의 손녀는 일본인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고, 사위와 정신없이 한국의 역사 유적지에 방문하기 바빠보이며,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 국적의 손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기특해보이셨겠어요.

 

 개 ㅆ 마이웨이로 살아온 제가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친정 식구들에게 애교한번 떠는게 너무 숙쓰러웠던 성향이 싹 사라지고 남은 인생이라도 엄마와 할머니께 정말 조금이라도 잘 해드리기위해 내 나름대로 가족을 대하는 소극적인 성격을 바꾸려 노력해야겠다 라고 생각하게 된건 정말 불과 얼마 되지 않았어요.

 

어린나이에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고, 또 꽤 빨리 독립을 하며 세상 혼자인듯 하고싶은 일 하며 돈벌고 살아가던 시절이 있었기애, 지금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친정 가족들에게 애틋함이나 후회감,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배로 커지게 된건 아닐까 싶어요.

 

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저는 정말 많은것을 배웠었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사람이 참을줄도 아는방법. 싫어도 싫은티 내지말고 사회생활을 했을때에 나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불리해지진 않는다는 사실. (물론 뒤에서는 혼자 와자자자자 스트레스를 풀어제끼지요) 등등.

무엇보다 인간을 대할때에 배려와 같은 사소하지만 긴간세계에 기본적인 도덕적 윤리와도 같은것들은 덤으로 길들여져 있었죠

 

그런 할머니께 애국자라는 칭찬을 들으니, 그 누구에게 듣는 칭찬보다 기쁨이 가득했죠. ⠀⠀⠀⠀⠀

 

한때 이시국에 쇼를 한다는 둥, 니가 무슨 일본사는 주제에 애국자냐는둥 어떻게하면 저사람을 내리 깔수 있을까 연구계발이라도 하는것마냥 비아냥대던 수준낮은 일부 네티즌들의 헛소리보다, 그냥 저희 외할머니께 듣는 애국자라는 말이 가장 최고의 찬사예요. ⠀⠀ ⠀⠀⠀⠀⠀⠀⠀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평화의 소녀상 위치 및 주소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2.3.4가동 율곡로2길 평화의소녀상

 

 

 

 

 

 

 

 

 

 

남편과 저는 연애시절부터 여기저기 걸으며 산책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동안에도 많은 언급이 있었지만 대학로에서 홍대까지 걸어가는 둥, 그 걸어가는 여정에는 많은 볼거리들도 즐비하고 1호선 노선과 2호선 노선을 번갈아가며 모든 역들을 지나가게 되어있어 제가 좋아하는 종로부터 인생의 절반이 물들여졌다고해도 과언이아닌 홍대근방까지, 어디든 걸어가니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므로 인해 발견하지 못하는 귀중한 공간이나 카페등을 발견하는 데에도 도가 텄죠 , 걸으며 이런저런 담소 나누며 예전 기억들을 꺼내는 감성놀이도 추가.

 

이날도 꽤 걸어다녔던 날이었습니다. 탔던 버스는 유일하게 홍대까지 저희를 데려다줄 273번 뿐이었어요. 아무쪼록 지난 여름에 김복동 할머님의 영화를 남편과 함께 에무시네마에서 관람했을때엔, 평화의 소녀상에 함께 갈 생각이 미쳐 떠오르지 못했었어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생활하며 여러가지 상황들에서 느끼게되는 점들이 머릿속에 하나둘씩 또 모아져 "그래 다음에는 남편과 함께 직접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러가자 "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바로 옆건물에서 몇년전에 3달동안 지인 가게에 아르바이트를 도와줬던 적이있었는데 그땐 정말 코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의상을 아침마다 지나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전일찍 안국역까지 버스를 타고와서 평화의 소녀상 앞을 지나 가게까지 오픈하기위해 향하던 발걸음과, 이번 남편과 함께 방문했을때의 마음은 정말로 남달랐습니다. ⠀⠀⠀⠀⠀⠀⠀ ⠀⠀⠀⠀⠀⠀⠀

 

 

 

 

 

 

 

 

 

 

이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기리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조형물(동상) 입니다. 평화비(平和碑) 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도합니다.(위키백과 발취 https://ko.wikipedia.org/wiki/%ED%8F%89%ED%99%94%EC%9D%98_%EC%86%8C%EB%85%80%EC%83%81)

 

 

저희가 갔을때에 평화의 소녀상은 누군가가 정성껏 뜨개질한 양말과 부직포로 만들어진 3가지 컬러의 나비 목걸이 및 목도리를 착용하고 있었어요.  저희부부가 일본으로 이주하기 전 동탄에 살고있을때 메타폴리스 광장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보았을때에도 제가 착용하고 있던 까만 머플러를 소녀상의 어깨에 감싸내고 돌아온 기억이 있는데요 ⠀⠀⠀⠀⠀⠀ ⠀⠀⠀⠀⠀⠀⠀

 

 

 

 

이 사진을 찍었던게 아마 2018년 작년 초 겨울이었을거예요.  홈플러스에 오며가며 항상 이 앞을 지나가며 평화의 소녀상 얼굴과 멈춰있는 눈동자를 보고지나가곤했죠.

저희는 일본으로 이주 하기 전까지 남편 회사가 있는 "동탄"신도시에서 생활했었어요. 서울 친정집으로부터 떨어져 명동쪽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40~분 가량 떨어져있는 곳, 동탄 메타폴리스 광장에는 정말 반갑게도 평화의소녀상이 설치되어있었거든요.

겨울이되면 사람들이 장갑과 모자, 목도리 등을 평화의 소녀상이 따뜻하도록 포근하게 둘러주기도하구요, 저도 이 사진을 찍고나서 착용하고있던 까만색 술달린 목도리를 평화의 소녀상 어깨 가장 바깥쪽에 꽁꽁 싸매주었답니다. 눈도 많이 내린 이후라 눈도 많이 쌓여있었고, 미끌미끌했던 날로 기억해요. 밤하늘 공기는 춥다못해 싸늘함 그자체. 하늘은 춥다는 날씨를 확인이라도 시켜주는듯, 까맣지 않고 영롱한 푸른빛이 돌았지요.

일제 강점기 시절에 저희 외할머니또한 가슴아픈 일들을 겪어오셨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온 유년시절에도 늘 꼭 붙어 함께 살아오며 유일하게 저를 돌봐주셨던게 바로 외할머니세요. 마음아픈 역사가 있어도 세상은 빠르게 흘러가고 당사자들의 마음은 이미 그시절 오랜 기억속에 시간이 덜컹 하고 좌물쇠로 잠겨버렸을지 모르겠지만 이세상 모든것들은 야속하게 흘러가고야말죠.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못한채 흐르는 시간속에 원망과 한탄은 더해가고 그것이 결국엔 무뎌져 더이상 뭘 하고자하는 끈기와 이성을 상실시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남편이 한국의 저희 친정에 방문했을때에, 뜻밖에 할머니의 이야기들에 남편도 잠시 말이 없어지기도했지요. 말씀을 굳이 안하셔도 저희 외할머니 정도 연세라면, 더군다나 일제강점기를 겪어오셨던 분이시라면 정말 일본이름은 하나씩 가지고 계셨을거라는 추측정도는 할수가 있잖아요.

"엄마~! 나한테도 그런거 이야기 안했잖아!"

일본이름이 가졌었다 라는 할머니의 고백에, 갑자기 놀라 외할머니팔을 잡아 당기며 엄마가 서운하시다는듯 말씀하셨죠. 저희할머니... 보통분이 아니십니다. (쿨럭) 수십년간 엄마한테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셨던... 뭐, 할머니 판단에는 이야기할 이유가없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죠.

남편은 지난 "말모이" 라는 영화에서 조선인들이 한글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악질적인 행위를 가하는 과거 일본이 저질렀던 만행을 영화를 통해 봐왔었고, 이렇게 실제로 일본이름을 가질수밖에없었던 것을 사실에 근거하여  직접적으로 들어볼 기회는 처음이었던것이고, 그런 경험또한 처음이었던거죠. 외할머니가 엄마한테까지 말씀을 안하셨다라는건.. 정말 할머니께서는 기억하기 싫으신 시절이셨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자녀들을 키우고있는 동네라 , 밤낮할것없이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광장 한켠에 설치된 소녀상에도 춥지 말라며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눈으로 확인할수가 있었어요 

 

 

 

 

 

 

이날은 남편과 오전일찍 종각 부근 김밥천국에서 분식을 먹고 한국 최초 우체국인 "우정국" 쪽 회계사 에 들러 새해 소망을 적고 그다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곳으로 이동 한 상태였습니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흰 비닐 텐트를 발견하고 안에는 한분이 들어가 앉아계신 것 같았어요. 대학생 소녀, 소년들이 돌아가면서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며 머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묻기 위해 텐트 안에 앉아있던 소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분께서는 서둘러 텐트 밖으로나와 저희를 환영해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어요 , 특히나 일본인이었던 남편을 보고 더 반갑게 맞이해주셨고 대학생들이 직접 만든 팔찌의 이야기, 놓여진 서명서 이야기 , 지금까지의 수요집회 이야기등등 간략하고 알기쉽게 정보를 전달해주셨죠.

 

학생분들이 직접 만드신 고무팔찌는 지난번 김복동 할머니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무료로 받았던 보라색 팔찌와 같았어요. 남편과저는 하나씩 골라 팔에 착용하고, 소녀상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평화의 소녀상이 있는 이곳에서 매주 수요일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립니다. 공식 명칭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입니다.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이 집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추산으로 연중 집회 참간 인원을 5만여명정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92년 1월 처음 시작되었고, 500회가 된 2020년 3월 등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 기간 집회 기록을 갱신하였으며 이 기록은 매주 갱신되고 있습니다 .

 

저는 아직까지 수요일 집회에 참여한적이 없어요. 기회가 된다면 남편과 함께 참여해보고싶지만 일단 현재까지는 제가 살고있는 이시카와현 고마츠 공항에서 인천공항편을 사용하면서 수요일은 한국에 있기가 힘든(어쨌든 수요일엔 또 돌아와야하는 비행기를 타는) 스케줄을 가지고 있다는 사정과 핑계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고마츠>인천공항행은 비행기가 일주일에 3일만 다닙니다)

 

따로 저혼자 시간을 내서 그 시간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맞추거나 언젠가 남편과 속시원히 기간에 제한없이 한국에 방문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할 것 같아요. 제가 남편을 만나 결혼하기 전에는 왜 가본적이 없었는지 그것이 알고싶을 뿐입니다. 하하..

 

때가 늦었어 라는 생각보다는 이제라도 제가 무언가 할 수 있고, 좀더 소녀상및 나라의 일들을 위해 에너지를 소비할 수 있음에 말 그대로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생각뿐입니다. 

 

 

 

 

 

 

 

2019년 한해에만 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 다섯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중엔 남편이 영화로도 접한 김복동 할머님도 계십니다

이제 스무분의 할머님들이 남은 상황인데요, 이글을 쓰고있는 2020년은 한일 강제병합이 맺어진지 110되는 해이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결성된지 30년을 맞는 특별한 해라고 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타향살이 하시는 많은 분들께서 그런 말씀하십니다. 고국에서 떠나고나서야 나라에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배가되고, 애국심이 불타오른다 라고 말이예요.

 

저역시 제 개인 삶에 찌들어 앞만보며 살아갔을때에는 너무나 익숙한 공간인 대한민국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았었어요. 나라를 떠나고서야, 그리고 일본에 와서 살면서 겪게되는 너무나도 난무하는 "허위사실" "왜곡보도" 등을 미디어로 통해 접하고 또 그것을 믿고 반응하는 이곳 사람들을 겪게되면서 정말 가슴에 한이 맺히고 내자신이 역사에 무식하고 무지하면 안되겠다. 라는 욕심이 생겨 뒤늦게나마 타오르는 열정이 충만할때 이렇게라도 , 간접적으로라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좀더 진중한 애국자가 되어야겠다 "되고싶다" 라고 생각한것입니다.

 

그리고 저와함께 동행해주는 남편에게 너무나 고마울뿐.

 

 

728x90
반응형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2020. 1. 21.

✎ Writer_maruko

서울출생, 디자이너출신의 한국인 아내 ,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인 남편의 점심도시락을 만듭니다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728x90
반응형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지난 2019년 연말부터 1월 초까지 일주일간 한국에 신년을 새러 다녀왔던 저희 부부, 

 

아시는 분들은 아시는 책인 "임정로드4000km" 의 저자이신 오마이뉴스의 김종훈 기자님을 정말로 감사하게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는데요, 한국에 도착했던 바로 당일이요! 기존에 없던 약속이고, 당일 종로에서 있을 기자님의 "청년의열단" 모임에  남편과 함께 참석할수 있는지 고민하고 남편이랑 상의하던 찰나,

 

저희가 서울에 , 그리고 광화문에 오는걸 아시고는 그리고 제가 이번 한국 방문중  사고싶은 서적 2권중 한권이 기존 블로그에 언급해왔던 것 처럼 김기자님의 "임정로드4000km"인걸 아시고는 직접 전달해 주시겠다구 연락이 닿었어요. 🥰 대박.

게다가 저희 부부의 실명이 담긴 싸인까지 해주시고 근방 카페에서 만나 직접 전달받으러 만나뵙기까지 했거든요! 진짜 짧은시간이었지만 ㅜㅜ 야근 스케줄까지 있으셔서 저희도 민폐된까봐 길게 뵐 생각은 아니였지만 뭔가 짧은 만남은 더더욱 아쉽고 다음을 기약하게 되는법 🙃

근데 대박 아쉬운 겁니다.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오마이뉴스의 김기자님께서는, 가나자와에 살고 있는 저희부부가 계절이 바뀔때마다 방문하고 있는 노다마치의  윤봉길의사 암장지와 가나자와성에 있는 공중 화장실이 윤봉길 선생님이 순국하시기 전날 하루 묵었던 옥으로 예측되는 정보까지 저희가 가나자와에서 윤봉길 선생님과 관련된 역사의 현장에 방문하는데에 정말 큰 도움을 주셨던 기자님이시기도 하세요. 그리고 그때 보여주신 사진은 이 "임정로드4000ĸм"서적에도 실려있었습니다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주시면서 저희가 올바른 위치에 찾아갈 수 있도록, 궁금증을 해소하며, 올바르게 정보를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감사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김종훈 기자님의 "임정로드4000km"을 구매하고자하는게 지금까지도 몇번 블로그에 언급했지만,  이번 연말 한국행에서의 반드시 사올 서적 두가지중 하나였고,

기자님께서는 저희 부부에게 싸인을 넣어 주시고 싶다며  진짜 너무나 감사하게 소중한 서적을 받을수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직접 만나뵙고 말이에요.

저희 한일부부의 이름을 새겨넣어주시고, 함께 적어주신 감동의 문구.

 

"길은 함께 걷기에 만들어집니다"

~대한민국 101년 광화문에서 김종훈~

맞는 말씀입니다 김종훈 기자님. 사실 남편이 기자님께 자기소개한다구 한국어로 연습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 못하고 끝나버리고 넘나 아쉽기 😂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기자님께서는 정말 번개처럼 다녀가셨는데요 (웃음) 꽤 바쁘게 본업에 충실하고 계신 존재이시기애  저희 부부를 만나주시는게 좀 불편하시거나 행여나 번거로워 하시진 않으실까,  하지만 몹시 설레고 기쁜거다. 라는 마음이 공존하며  안절부절 못하며 기자님을 기다렸더라죠ㅠ

당일에도 한국에 , 그리고 광화문에 간다는걸 알게되신 기자님께서. 근방에 계시니 갑작스럽게 잡히게된 약속이니만큼  단 1초를 민나뵙더라도 감지덕지 👏🏻아니한가요.

바쁘셨을텐데 넘나넘나 감사드립니다.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너무나 부끄러운 사실 중 하나입니다만, 저또한 해외 이주를 하게되고 한국과 떨어져 지내게되면서 모국에 대한 애정이 더 불타오르게되고 일본살면서 매스컴에서 접하게되는 한국을 비하하는 습관적인 방송들을 보며 좀더 애국심이 들끓게되는게 제가 서른넘어 조금이나마 사소한 한국의 역사 문제에 한걸음한걸음 하는와중에 이렇게 김기자님의 임정로드4000km 서적을 늦게나마 접하게되었고,

그리고 김구선생님께서 서거하셨던 장소가,

늘 홍대로 출근하며 탔던 273버스 창밖으로 보였던 곳, 지난 여름방문 남편과 들렀던 서울 역사박물관의 옆, 매일매일 걸어다니기도했던 삼성병원안에 있는 강북 삼성병원의 분주한 병원 입구에 자리한 경교장 이라는것.

이걸 이번에 알게 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알고계셨나요?

바로옆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고, 무료이기때문에 어렵지않게 일반 시민들도 방문할 수 있으며, 저희부부역시 그 장소로 발걸음 했습니다. 저희남편은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시계 이야기를 잘 알고있어요. 때문에 그 이야기와 연결고리를지어, 김구 선생님의 이야기또한 관심있게 알아가고싶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종각에서 인사동 가는길에 길거리에서 책을 팔고계신 아저씨가 계셨는데, 김구선생님의 얼굴이 표지인 서적을 너무나 사고싶었거든요. 그냥 지나쳤다가 남편의 "사면 좋잖아" 라는 말에  발길을 돌려 서적을 좀 보니,,,, 전부 중국어인것 뜨허!

넘나 아쉬운것... 윤봉길 선생의 책도 중국어..... ㅠㅠ

 

 

 

 

 

임정로드4000km 김종훈기자님을 만나뵌 영광 (일본인 남편과의 조우)

저작권 문제로 페이지를 찍어서 올리거나 하기는 좀 힘들 것 같지만, 하루빨리 서적을 완독한뒤, 감상문을 적어내려갈까봐요. 공덕역 부근의 효창원 역시, 다시한번 제대로 방문해야하는 곳중의 한곳이 되었어요. 서적은 중국, 한국, 그리고 제가 살고있는 가나자와, 그리고 오사카의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철저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의 내용 구성을 지니고 있어요. 또한 제가 남편과 진작에 다녀왔던 식민지 역사 박물관의 이야기도 볼수있어서 굉장히 의미가 깊었습니다

 

책의 페이지도 생각외로 제가 좋아하는 적당히 매끄러운 소재이고, 상당히 글을 읽고싶게 만드는 서적.

 

김구선생님의 서거현장을 다녀온 일상도 어서 포스팅 해보고싶네요 🙂

728x90
반응형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가나자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한일부부

2020. 1. 19.

✎ Writer_maruko

서울출생, 디자이너출신의 한국인 아내 , 일본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일본인 남편의 점심도시락을 만듭니다

가나자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한일부부

728x90
반응형

본 게시글의 최초 게시일은 2019. 7. 22. 17:50 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100주년의 2019년.

가나자와에서의 의미있는 한 걸음.

 

안녕하세요 :) 가나자와 생활중인 한국인 아내 마루짱입니다.

이 글은 8월15일에 완성하여 광복절에 올리기위해 조금씩 작성해둔 글입니다만,

좀더 빠른 시일안에 올리게되었습니다.

글이 길어지니 모니터 화면에서의 읽기도 추천드립니다.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7월 21일.

4개월만에 찾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에는 무성한 나뭇잎들과 풀들이 자란, 숲에 둘러쌓인 계절의 풍경으로 변한 후였습니다.

일본에서는 국회의원선거가 있었던 7월 21일, 일본의 #수출규제보복 문제로 이해 한국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일본여행취소 #일본제품불매운동 등이  연일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에, 한주동안 꽤 이 문제로인해서 마음이 시끄러웠던 저는 정말이지 갑자기 오전부터 이유없이 산에 가고 싶어졌어요.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 아침만 되면 여러가지 잡지를 찾아보며 "마루짱 이번 주말에는 어디에 가보고싶어?" 라고 묻는 그이 덕에 생전 처음 가본적도 없는 곳들, 새로 경험하는 데일리가 많았던것은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이번주 나의 대답은.

"오랜만에 노다마치에 다녀올까?"

 

 

아침일찍 남편과 저는 마트에 가서 묘지에 꽃아둘 꽃을 사고 , 필요한 재료들을 구매하고서 차를타고, 가나자와역 근처에서 30분정도면 다다를 수 있는 노다마치의 윤봉길 선생님 암장지 에 다녀왔습니다. 지금이 여름이라는 시기를 새까맣게 망각한채, 남편은 반바지 반팔, 저역시 반팔 차림이었던것이 TV에서만 보고 라디오에서만 듣던 , 수십마리의 모기떼 에게 공격을 당할것이라는것을, 그들에게 오랜만의 포식과 같은 뷔페를 제공하게될것이라는것을 예상도 하지 못한채로 말이죠.ㅠㅠ (방문하시는 분들 여름에는 꼭 약 챙겨가시거나 모기약 무장 하고 가시기를 바라요.)

당일은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날이었어요. 남편은 여러가지 이유로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니  독재국가의 일본이 아니라면 뭐라 압력 넣을 이유가 없겠지요 (민주주의 국가라면서요)

21일의 썰을 잠시 풀자면... 이시카와현에서는 두명의 후보가 나왔는데, 한 후보는 정말 신인후보. 또 한 후보는 개인적으로는 언급하고싶지도않은 X민당 후보였습니다. 결국 X민당후보와 신인이었던 후보가 모두 좋은 결과를 얻어냈지만 여러가지 흐름을 미루어봤을때 남편은 X민당에 표를 주기 싫은 모양이었어요. 일본에서도 택시를 타거나 노년층과 대화를 나누면, 아X가 참 잘하고있어 등등의 이야기들을 듣게되어 답도없지만, 그런사람들이 많이 노출되느라, 정작 중년층과 젊은 층의 입장들은 묵살되는 경우가 많아요.

참고로 남편과 저는 옳고 그름 앞에서 조차 "중립을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맞고 틀림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속에서도 중립을 지킨다 라는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일들중 참 모순적인 불쾌함을 가져다줄때가 있었어요. 예를들어, 학교에서 누군가가 심한 따돌림을 당하는것을, 저는 적어도 중립을 지킨답시며 얌전히 이성적인 태도를 취한다기보다는 함께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그 아이의 곁에 늘 있어주는 인간인게 맞다는 제 소신을 가지고 있어요.

소신이요.

엉뚱한것에 소신을 지키는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계산했을때조차 "이건 진짜 아니지" 싶은것들앞에서 지켜내는, 주위의 분위기에 귀팔랑, 이리 저리 흩날리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아닌 굳건한 신념. 생활력이 꽤 강한 저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내고 소신을 갖게되는 생활환경에서

어쩌면 자라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인생선배들에게 좋은 가르침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이예요.

어느 정당의 유세현장에서, 반대의 인터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신고를 당하고 폭력을 당하고.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보며 느낀것이지만은 적어도 일본보다는 우리나라의 시민들이 시민의식이 깨어있고 민도가 높으며 더이상 억지스러운 거짓놀음에 속아나는 일은 예전보다는 어려워졌다는 것 정도는 제가 알아요. 일본의 저런 상황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몇년전까지 이어졌다라는것을 생각하면 정말 아찔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대한민국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시기이기때문에

저는 참 행복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에 중국 상하이 에서 조직,선포된 우리나라의 임시정부를 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 정부였고,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는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27년간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핵심체로 큰 역할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뭐든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감정적인 인간이라는 동물로써, 굳이 이야기를 새겨 내려가보자하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딱 대한민국 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의 해인 2019년 3월 1일인 3*1절, 일본인 남편과 함께 30수년간 내 몸뚱이의 모든 생활이었던 대한민국을 떠나 남편의 고국인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남편은 한국의 회사에서 4년반 남칫한 회사 생활을 해오다가, 저와의 결혼후 일본으로 전직을 한 케이스로, 한국인 아내였던 저는 미리 예정이나 해둔듯이 일본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절차를 밟게되었지요. 마치, 일본인 남편과 결혼을하면 언젠가는 일본에 가서 살아야. 한다는 현실속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 처럼요.

그래도 남편은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하고있고,  한국의 회사에서도 감사패까지 받을 정도로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회사생활에 임했으며,

한국동료들및 친구들도 두루두루 사귀고, 또 자연스럽게 한국 역사에도 무지했던 지식을 채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저희 남편은 이런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한국을 좋아하고, 서울보다는 동탄을 좋아하고😓 ,  한국의 4계절의 공기를 사랑하는 마음 뜨거운 일본 남자입니다.

자랑이냐구요?네, 어떤부분으로는 자랑이 될까요?

이주 준비를 하던 당시때부터 하루하루 블로그에 기록을 옮겨두었었던것으로도 알수있었지만,  예정되었던 다음 회사의 스케쥴, 집을 구하는 문제와 더불어 여러가지 업무를 봐야했던  여러가지 일본생활 준비를 통털어 정해졌던 이사 준비였기애. 감정을 추스린다, 추억 정리한다 뭐다할 시간도없이 남들보다 좀더 빠른 시일안에 후다닥 정리해서 이주하느라, 진짜 너무나 정신없이 전개되어 혼란스럽기까지 했어요.

정신 차려보니 7월입니다.

올해 초부터 남편이 한국에서 늦게나마 접했었던 한국의 마음아픈 역사속의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박물관을 통해 체험하며 , 일본 자국의 선조들이 다른 한 나라를 점령하려했던 일제 강점기 때의 한국에서 무슨일들이 있었는지,  한국 선조분들에게 어떠한 만행을 행했는지, 일본에서의 폐쇄적인 역사 교육으로는 절대 배울수 없었던 역사들을 고스란히 접하게 된것이죠.

이부분은 일본 친구인 사야카짱이 했던 발언과 일치합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던 일본인 남편과 , 오래된 친구 사야카짱의 용산구 식민지 박물관과 서대문구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방문기(영화말모이까지), 의 글들을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고, 마음에 와닿는 코멘트를 적잖게 남겨주셔서 저에게도 큰 뿌듯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도 봐주시고 공감해주고 계신 분들이 계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차가움이 가시지 않았던 지난 3월

그리고

가나자와 성 공동화장실.

가나자와성 매표소 오른쪽으로 가장 처음 보이는 공동화장실"윤봉길 선생이 순국 하시기 전날 하룻동안 묵으셨던 위수감옥터으로 예측되는 공간입니다" ​

남편과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로 이사를 오게된것은 무척 우연이기도, 필연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한국의 국내의 역사기록 지역은 직접 찾아가기 쉽지만, 비행기나 배를 타고 나가야하는 해외의 지역은 쉽사리 방문하기 어렵기때문인데,

이주를 하게된 가나자와라는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로 윤봉길 의사의 순국지가 있다라는것은  정말 방문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였기때문이었어요.

과거 블로그 이웃분으로부터도 추천을 받았지만,  이미 이시카와현에 윤봉길의사의 순국지가 있다. 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기때문이예요.

제가 윤봉길 선생님의 역사공부를 하는데에, 현장까지 잘 갈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셨던 감사한 분이 계신데요, 바로 임정로드 4,000km 저자이시기도한 오마이뉴스 의 김기자님이세요. (김종훈기자님)

아직 이시카와현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판가름이 안서던 때, 한국인들에게 이시카와현의 인기관광지인 "가나자와성"은 가나자와 입문 새내기로써 한두번정도 다녀온 상태였지요. 남편은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몇주동안 공시간이 있어 , 새로운 회사에 첫 출근하기전에 마지막 휴가라고 생각하고 어디든 다녀오자고 한 상태였고,

비가 부슬부슬 아침부터 떨어지는날, 일본인 남편이 먼저 꺼낸 한마디. "지난번 이야기했던 한국 독립운동가의 묘지에 다녀올까?"

(사실 이때까지만해도 윤봉길 선생님의 이름 석자는 잘 몰랐던 남편)

일단 날씨가 좋진 않았지만, 묘지만으로는 성이차지 않았고,  기왕 나가는거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다 다녀오는것이 좋겠다. 싶었습니다. 어디를 가면 좋을까요. 좀더 많은 곳이 있진 않을런지요.

외출을 준비하면서 네이버 블로그 검색을 통해 한 기사를 보게되었고, 우연히 오마이뉴스의 김종훈 기자님의 기사 링크를통해 기자님의 블로그를 안에서 정보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무심코 적은 코멘트에, 김종훈 기자님께서는 실시간 답변으로 블로그에 코멘트를 달아주시면서 채팅아닌 채팅같은 정보를 전달해주시어 저희 부부가

가나자와성 안에 있는 윤봉길 선생님께서 순국하시기 전 하루를 머무신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찾는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종훈 기자님 감사드립니다.

 

 

 

가나자와성 매표소 오른쪽으로 가장 처음 보이는 공동화장실"윤봉길 선생이 순국 하시기 전날 하룻동안 묵으셨던 위수감옥터으로 예측되는 공간입니다" ​

 

가나자와성에 대한 관광모드의 자세한 설명은 이번 포스팅에서는 배제하겠습니다.

역사 되짚어보기도 되짚어보기이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은 남편의 나라이기도 하지 않는가요.  내나라 역사 공부를 하려고 남편도 처음 겪는 이시카와현까지 이주를 한것이 아니니. 내 목표만을 달성하고 돌아갈것이 아니라, 남편이 하고 싶은것또한 함께 진행하는것이 도리이죠.

저는 꽤 보는둥 마는둥 이었습니다만은.

처음 왔을때에는 눈도장만 찍어두고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이곳까지 시간내서 함께 와준 남편은 가나자와 성 안을 골고루 보고 싶은 모양이라, 저도 겸사겸사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검사도 하지 않는 티켓을 각각 310엔을 주고 구매하였습니다.

티켓을 두장 끊기전, 가나자와성 매표소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큼지막한 공동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헌데, 이 공동 화장실에는 정말 충격적인 과거가 있다라는것을  나중에 알게되었습니다.

.

.

.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그래, 너희 나라에도 다양한 역사가 존재하겠지.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했을때의 끔찍한 악몽과도같았던 수십년의 불행의 과거 이외에

전혀 관계없는 너희 나라만의 고유의 역사가 , 여기저기 살아숨쉬고 있겠지.

우리가 우리 역사를 소중히하듯, 너희역시 너희역사가 대단하고 고귀하겠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날씨가 날씨였던것 만큼, 계절이 계절이었던 것 만큼 3월 22일의 하루는 왠종일 회색빛 세상이었습니다. 언제그랬냐는듯 세상의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가고, 모든것은 바뀌고 움직일 수 밖에없습니다. 그나라의 국민이 그나라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따라 그나라의 국격의 차이는

절대적으로 비례한다. 라고 생각하게된것이 2019년의 제 자신입니다.

어찌저찌 일본인 남편과 결혼을 했고, 도쿄로 갈수도, 요코하마로도 갈수도 있었던 나의 미래가, 이곳 일본 이시카와현으로 오게된것은 우연이든 필연인지, 그렇게 결정된 것이었어요. 한국내에서는 역사 기록을 확인하기 쉽지만, 외국에 있는 장소는 한국인들이 쉽게 방문하기는 정말 마음 단디 먹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이니까요.

남편과도 저역시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소통과 공감이 필요했고, 저역시 남편을 이해하려 노력, 남편 역시 제 마음을 이해해주려 노력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불편한 이야기 꺼내기 싫어하는것" 에대항 성향, 둥글게 살아가기 위해 본인의 신념은 사회에서 묵살해야하는 문화, 공기의 흐름을 읽고 공기의 분위기를 따른다 라는  그런 지긋지긋한 것들이  지금의 자국의 "역사" 문제를 다루고 대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것을 점점 조여와 최악의 사태까지 이른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서로의 나라의 성향과 문화가 조금씩은 장점이 될지 모르나  그문화가 맞다. 그렇게 하는게 옳다라고 하시는분들은

그냥 국적을 바꾸세요.


가나자와성 매표소 오른쪽으로 가장 처음 보이는 공동화장실

"윤봉길 선생이 순국 하시기 전날

하룻동안 묵으셨던 위수감옥으로 예측되는 공간입니다"

 

가나자와성에 들어가시게된다면 꼭 한번 더 생각해주세요.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 의사는 오사카에서 사형 집행을 위해 비밀리에 가나자와로 압송된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훙커우공원의거(도시락 폭탄 사건)로 상해파견군 제9사단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상해에서의 공개 처형도 언급되었지만, 김구 선생의 체포를 위해 윤봉길 의사의 사형 집행은 계속해서 연기되었다. 그러던 도중 국제여론은 악화되었고, 이를 의식한 일제는 윤봉길 의사를 오사카성 안에 있는 제4사단 육군위수형무소에 이감시키기로 결정한다.

윤봉길 의사는 11월 18일 상해에서 호송되어, 11월 20일 오사카성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사형이 집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가 오사카로 이감되자, 오사카 반제국주의 동맹에서 윤봉길 의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오사카 반제국주의동맹은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일제를 향한 재일 조선인들의 민심은 날카로워져만 갔다. 불안함을 느낀 일제는 오사카에서의 사형 집행을 철회하고 삼엄한 경비 속에 윤봉길 의사를 가나자와로 압송시킨다. 가나자와시에 있는 모리모토역에 하차한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성 안에 있는 위수구금소로 보내진다. 윤봉길 의사는 위수구금소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19일) 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윤봉길 의사가 뜬 눈으로 지새운 위수구금소 건물은 현재 철거된 상태이며, 그 자리에 공중화장실이 들어섰다. 가나자와성 하시즈메문의 입장표 발권소 건너편에 있는 공중화장실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 인용 :http://omn.kr/1iukw]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역사 학계에서는 아직도 가나자와성 안에있는 현재 공용 화장실중 하나가, 윤봉길의사가 순국하기 전날,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구금소 였을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임정로드4,000km 저자 이시기도 하신 김종훈 기자님께서는 가나자와시 데이터베이스에서 발견한 정보들을 필두로, 바로 이 공용 화장실이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구금소였다는 것을 확신하신 듯합니다.

가나자와성 정문에서 너무 가까이 있던 , 접근하기가 너무 쉬웠던 점으로 "설마설마, 여긴 아니겠지" 라며 지나쳤던 생각은 마음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너무나 사람들에게 현재로써는 "공용화장실" 이라는 건물의 개방된 곳이라는 아이러니함과 참담함. 참으로 치욕스러운 마음에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에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과 함께 가나자와성 내부를 둘러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지나가는 한국 남성 여행객도 지나치고, 많지는 않지만 종종 만날 수 있는 가나자와에서의 한국 관광객들을 보면 내심 마음 한구석에 안심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분들은 알고 오신것일까요, 혹, 조금이라도 인식은 하고 계신걸까요.

혹은. 여행으로만 오셨다가 굳이 비행기타고 방문해야만 힘겹게 다다를 수 있는 이 역사적인 공간을, 여행과 함께 겸사겸사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라는것도 모른채, 개인 여행만 즐기시던 분들이실까요. 물론 알던 모르던 그들의 자유이기애 저로써는 감나와라 배나와라 , 감히 판단하거나 신경쓸 문제는 아닐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과 가나자와성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매하기전에 다녀왔었던 공동 화장실의 건물이 들어서기전 윤봉길 선생님이 하룻동안 묵으셨던 위수감옥터 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된후 온몸에 소름이 돋아 견디기가 힘들더군요.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앞서 이야기한바가 있는 오마이뉴스의 기자님이시자, 임정로드4,000km의 저자이시기도하신 김기자님께서는 실시간 블로그 답변 리플들로, 저희 부부가 조금이라도 더 역사적인 공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기자님 블로그에 있던 단 한장의 사진만을 가지고, 여기저기 살펴보며 고민하던 일본인 남편.

"마루짱, 아무리봐도 그 화장실은 저기가 맞는것 같아.

우리가 지나간 화장실."

정말 아니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남편과 함께 블로그의 사진을 저장해두고 보고 또보고 길을 따라가 다다른 곳에서 펼쳐진 눈앞의 모습에.

갑자기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ㅍ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저여자 뭐하는거야?"

지나가던 젊은 일본사람들이 다 들리게 중얼대며 내 뒤를 지나갈때까지도, 저는 과거 윤봉길 선생님이 구금되셨던 구금소로 추정되는 매표소 오른쪽 공동 화장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잠시 두눈을감고, 두손을 모아 여러가지 마음의 기도를 했습니다. 아무렴 어때, 누가 보면 어때, 이런 내모습보고 저렇게 떠들면 어때.

아까까지 내 뒤에 따라오고있던 남편은 어디에있는지 신경쓰지않은채로 오로지 성큼성큼 걸어나와 이렇게 기도해봅니다. 1분 남칫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을지. 천천히 눈을뜬 저는 저의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짐을 알고 고개를 돌려보았고, 나와같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뒤 눈을 감은 상태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남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져미는 느낌.

당신 뭔데, 당신이 왜 이렇게 함께해주는건데. 왜이렇게 고마운건데.


윤봉길선생님의

가나자와암장지

 

모두 아시겠지만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1945년 해방 이후 발굴되어

현재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어계십니다.

 

 

비교적 가나자와 성 자체는 가나자와 여행객들도 쉽고 무난하게 다다를 수 있는

가나자와 시내 안에 들어가있는 인기있는 관광지였기때문에 보고 느끼는데에 시간도 오래걸리지않고 어려움이 없었지요.

또한 현재에는 과거 윤봉길 의사가 구금 되었을것으로 추정되는 아마도 가장 확실한 곳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용화장실로

다시 지어진 모습을 보고, 암담함에 오히려 마음에 와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윤봉길 선생님의 가나자와 암장지로 향하면서 점점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대중교통이나 혹은 자동차를 타고 가야만 그나마 어렵지 않게 다다를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가나자와 역 근방에서 30분정도남칫이면 , 도착할 수 있는 공동묘지 안에 바로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가 존재합니다.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石川県戦没者墓苑)'에는 윤봉길 의사의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비(암장묘비)가 있습니다.

'전몰자 묘원'은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죽은 자들을 위한 공동묘지이기도합니다.

주소 :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쵸 노다야마 4-1 휴게실부근

(휴게실건물 바로 오른쪽 내리막길계단)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에서 총살 당하셨고.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시 미쓰코지야마 서북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여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습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돼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으며,

그 매장 장소는 바로 이곳.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일본군은 신문에 '윤봉길의 시신은 화장했다'라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이시카와현 전몰자 묘원의 소각장 옆 좁은 통행로에 암장했습니다.

어제는 이젠 두번째 방문이라고 꽤 쉽게 찾아갈 수 있었지만,  구글맵만 가지고 이곳을 찾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하나, 길을 잃어서 찾기가 어려운 상황에 쳐해도, 절대 지나가는 일본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진 않으리라, 혼자서라도, 남편과 둘이서 해결할것이다. 라는 괜시리 집념같은 마음이 살아나기 시작했죠.

그리고, 처음 방문했고, 처음 암장지를 발견했을땡[ 경황이없어 밟고 내려왔던 계단들을 다시한번 올려다보니, 아. 어디선가에서 본 사진.

바로 그곳이구나 싶어 제가 저 계단을 밟아도 되는건가요, ㅠㅠ 라며 조금 죄스러운 마음마져 들 정도였습니다. 암장지는 멋드러지게 넓직하게-_-;; 꾸려둔 러일전쟁에서 죽은 일본의 군인들을 기리는 국군 묘지앞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왼편으로 국군묘지를 지나가다보면 바로 오른쪽에 작은 휴게소 건물이 나오는데  그 옆계단이 바로 저 사진속의 계단인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가려 고개를 빼꼼 내빼다보면, 고귀하게 자리잡은 윤봉길 선생의 암장지 현장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쓰레기 하차장 앞에 사람들이 걸어다니면서 밟으라며, 윤봉길 선생님의 유해를 봉분없이 처참히 묻었던 잔혹함. 또한 이곳에 암장된 이유는 , 일본 헌병대 관리실이 있던 곳이므로  언제나 감시될 수 있는 자리였기애 이곳에 매장했다고 전해내려지고있어요. (비열 그 자체....-_-)

또한 봄과 가을에 일본 군인들을 위한 큰 제사가 있는데, 제사 후에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가 바로 이 암장지였다고하네요. 뒤끝이 아X총리 저리가라입니다.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 이라고 한문으로 표기된 표지석 (동그란 비석)

표지석 바로 좌측으로 석묘처럼 만들어져 촛불을 피우고 헌화할 수 있게끔 잘 조성되어 있는 공간이있습니다.

'장부출가 생불환'이라는 윤의사가 남긴 말이 한자로 새겨져 있어요.

지금 현재 포스팅에서는 올해 3월 22일에 방문한 기록의 사진들을 기준으로 작성하고있습니다만, 다녀온 어제 7월 21일의 한여름 이곳을 방문했을때에까지도 저는 저 자료고를 열어볼 생각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 문만 열면 방명록을 쓸수있는 수첩이 있다고하는데 ㅠ_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뒤, 두번째로 방문하는 기념비 장소에서는 다녀간 방명록을 항상 기록했었는데요, 참나... 휴..

마음과 머릿속에는 온통 지난 3월 22일에 방문했던 기억들밖에없기애, 산속의 모기도 걱정 안하고 무작정 무방비 상태로 남편과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방문한것은 정말 큰 용기였습니다

 

 

여름에 방문하게되실 분들을 위해 간략한 팁을 드리면,

여름이 되어 방문하니 좀더 길고 높아진 숲안에 쌓여진 귀중한 공간의 느낌인것과 더불어 수십마리의 모기들에 휩쌓여 ,  집중해서 기도드리기도 어려울정도 준비해온 술을 여기저기 뿌리지도 못할 정도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남편이 정말 괴로워했어요. 반바지를 입고있어 저보다 배로 물리고 있었거든요.

모기약 몸에 바르고 가시거나, 관련 도움이 될 약들은 꼭 챙겨가시는게 좋습니다. 산속이다보니, 여기저기 거미줄이나 거미, 등 신기하기까지한 벌레들이수시로 왔다갔다하는데 그상황에 벌레가 뭐가 중요하냐만은 저는 알러지가 일어날정도로 벌레에 취약한 성격에서 정말 그나마 잘 참으며  남편과 나뭇잎도 쓸고, 정리도좀 하고 준비해온 꽃도 꼽고 찬조금도 넣고 할것은 다 했지만,

왠지 윤봉길 선생님이 내려다보고계실것 같은 그 장소에서 남편이랑 저랑 오두방정을 떤것 같아 할도리를 다 못한것 같은 느낌에  정말 현장을 떠나는 내내 찝찝하고 죄송한 마음이 컸다죠. 약 꼭 챙겨가세요. 바르는 약이든 뭐든. ㅠ_ㅠ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자료고 오른쪽 문에 부착되어있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발굴단 사진

윤봉길의사 유해발굴단이, 윤봉길의사의 유해발굴 당시, 분통을 금치 못했다고하죠.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당시 일본인들의 악랄함이 현장에 고스란히 남아있었기때문이에요. 공동묘지 관리사무소 입구이자, 쓰레기 하치장 앞 바닥에 안치되어있었는데, 사람들이 걸어가면서 밟으라고 하기위함 이었다고 전해지고있어요. 그 자리에 지금2019년에 제가 서있다고 생각하니, 소스라치게 서글퍼지고,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광복 후 14년만에, 윤봉길 선생의 유해는 대한민국으로 봉환됩니다.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은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재일 한인들의 도움으로 윤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는 데 성공하였는데요. 당시 현지 발굴단의 조직을 보자하면 발굴본부장 서성민, 총지휘 박기섭, 사진 김창율,  현장책임자 박동조, 정보 박성조, 수송 노경수,  섭외 구범식 김기억 등과 같이 조직적으로 발굴을 수행하였습니다.


발굴 나흘째 되던 3월 6일, 정보 박성조가 매장을 할때 독경을 했다는 각존원의 야마모토 료도 라는 여승을 데리고 왔는데.

여승은 헌병이 가리키던 곳 보다 더 육군 묘지에 가까운 통로를 가리키며 그곳에 북침으로 매장했다고 알려줬다고합니다. 그곳은 며칠동안 발굴단이 휴식처로 사용했던 장소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 이었고, 현장 책임자 박동조가 소금을 가지고와 일대를 깨끗이 한뒤 술을 따르는 의식을 마치고 땅을 파면서 윤봉길 선생의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됩니다.


저도 뒤늦게 알게 된것인데요, 윤봉길 선생의 유해를 발굴뒤 이틀간 안치했던 곳이있는데 그곳은 시간을 내서 별도로 방문해보고싶은 곳으로 리스트에 넣어두어습니다. 현재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고하네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히가시야마 2-16-3)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는 약 2평정도의 넓이로, 2017년경 영구 임대를 받아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 암장지로부터 1km 지점에 , 윤봉길 선생의 순국지가 있습니다만, 일본이 허락하지 않아 갈 수 없는 곳으로 알려져있고, 더 마음이 아픈것은 이곳 암장지에 윤봉길 선생의 유해중 일부(손뼈 등) 소나무 뿌리에 얽혀 아직도 이 암장지에 남아있다고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당시 유골은 총 201개 수습되었었는데, 7개가 모자라는 상태에서 이는 손뼈 등이 고문 등으로 상해버려 13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소나무 뿌리속에서 없어진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이번에 갔을때에는 지난번에 없었던 푯말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손수 글씨로 적어내려가신 푯말이었는데요. 아무래도 한국분들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는것 같았고, 추가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서 "전화주시면 10분내로 올 수 있습니다. 전화주세요"(부가내용생략) 라며 번호를 적어놓으셨고, 그 아래에는 "박현택" 이라는 세글자의 성함역시 적혀있었습니다.

일본인남편은 이 푯말을 가장먼저 발견하고는 (아..언제나 나보다 먼저 발견하는것이다.....ㅠ_ㅠ)

"마루짱, 이전에는 이것 없지 않았어?" 라며 먼저 캐치해 주었기애 저도 발견할 수 있었죠.

기특기특....

알고보니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를 영구임대하는데에 성금을 모아 기여하고 관리하셨던 2009년에 돌아가셨다는 박인조 선생님의 조카이신 재일교포 박현택 회장님이셨어요. (인터넷의 기록으로 알게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집이나 사무실이 근방에 있으신 것 같았어요.  어제 7월 21일 방문까지 저희부부는 총 2회차 방문이었는데, 여기저기 쏘아대는 모기떼 덕분에 더이상 머무르기 힘들어 일단 할 도리는 최대한 한뒤 암장지를 떠났지만은, (어제의 기록역시 유튜브 영상으로 담을 예정이예요 ㅠ)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다음 방문때로 예상되는 늦가을 즈음에는 박현택 회장님께 직접 연락을 드려서 조금이라도 남편과 제가 자세한 설명들을 듣는것을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합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하려구요. 저역시 인터넷의 후기라던가, 간략히 추려진 책의 내용들을 토대로. 그리고 앞서 설명된 임정로드 4,000km의 저자 이시기도한 김종훈 기자님의 피드백으로 겸사겸사 다녀오고는 있지만, 박현택 회장님의 설명을 들으면 좀더 자세히 몰랐던 역사의 일부를 전해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첫번째로 방문했을때에는 경황이없어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채 방문만 한 채였는데요, 이번에 두번째로 방문했을때에는, 꽃과 꽃병 (꽃병은 필요없어서 그냥 가지고왓어요 ㅠ) 소정의 찬조금과 진로 소주를 가지고 왔습니다. 소주는 남편과 플라스틱 작은 컵에 서로 따라 비석 주변에 골고루 뿌리고 그리고 좁은 통로 계단에도 뿌렸습니다.

"노여움 푸세요......" 라며.

그리고 나보다 더 길게 기도하던 남편. 아... 모기가 정말 괴물처럼 달려들더군요 ㅠ_ㅠ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다 저조차도 처음엔 발견하지 못했던 비석 뒷편에 있는 곳에 방문자 누구나 쉽게 사용하게끔 준비되어있는 청소 도구들을 하나 가지고와 여기저기 널부러진 잎들을 쓸어내는 남편. 뭐부터 해야할지 잘 몰라 긴가민가하고있던 제 옆에서 솔선수범 빗자루를 가져와 비석 근처를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정돈하는데에 앞장섰습니다.

내가 먼저 해야하는데!!!! 또 남편에게 선두를 빼앗기고 맙니다.... ㅋㅋㅋㅋㅋㅋ

너무 고맙고. 늘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한국의 이야기나 한국 역사등에 귀를 기울여주고, 또 직접 참여해서 자신의 부인의 나라에는 어떤 마음아픈 역사가 있는지 오해없이 알고싶다며 노력을 서슴치 않는 저희남편에게 늘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순국기념비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쵸 노다야마 4-1 윤봉길의사 암장지적비 부근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윤봉길 선생의 순국 기념비는

"윤봉길 선생의 유해를 암매장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그 장소를 기리기위해, 재일한인들이 성금으로 세운 암장지적비와 순국기념비가 건립된 곳입니다."

순국 기념비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묻혀있던 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5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언덕에 자리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7월중순) 숲이 우거져있어 좀 자세히 살펴봐야 발견하실 수 있지만 도로와 경사높은 계단으로 이루어져있기때문에 계단을 발견하셔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윤봉길 선생의 순국기념비를 쉽게 찾는 방법은 바로 , 다이죠지쿄우료우 공원을 찾는 것이기도한데요.

저희가 늘 주차하는 주차장 바로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던건 다름아닌 윤봉길 의사의 순국 기념비입니다.

주차장의 이름은 " 大乗寺丘陵公園 "(Daijoji Kyuryo Koen Jobu Parking ) <다이죠지쿄우료우공원주차장> 입니다.

주소는 石川県金沢市長坂町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나가사카마치)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바로 이런 커다랗고 길죽한 간판을 보게된다면 넓게 펼쳐진 공원과 넓은 주차장을 보실수 있을거예요.

이 공원은 가나자와 남부에 펼쳐진 구릉지로써, 가나자와를 대표하는 공원(종합공원)이기도합니다. 주차장은 3개로 나뉘어져있고, 주차당 입장료도 무료입니다.

 

이곳은 잔디언덕과 꽃놀이에 인기가 많은 공원이기도한데요, 가나자와의 야경을 내려다 볼수 있는것또한

잘 알려진 여행 관광지이기도합니다. 대락 4월 중순부터 5월상순까지 절정을 이루는 철쭉 제철을 만끽 할 수 있는 공원으로도 유명하죠. 암튼 이외에도 꽃이 피는 공원으로 인기인 곳이기도해요. 아무튼. (이해를 돕기위해 본 공원을 설명드렸어요. 꽃이 가득하거나 푸른 언덕이 보이고 이 간판이 보이면 바로 그곳입니다.)

이 공원의 이 간판을 왼쪽에두고 길을 건너면, 왼쪽에 기념비, 오른쪽에는 또다른 묘지가 펼쳐지는데, 좌측으로 건너 쭈욱 내려가다보면 어렵지않게, 앞서 소개한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코앞에 일단 기념비가 있긴하지만, 돌아올때 들르는곳이 이곳 순국 기념비예요.

이제는 순국 기념비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게되었구요.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와 암장지적지 부근에는 러일전쟁 때 포로가 되어 가나자와에 연행되어 왔다가 사망한 러시아 병사들의 묘가 있죠,

러일전쟁 말기 가나자와에는 약 6천명의 러시아군 포로들이 시내 각지에 나누어져 수용되었고, 일본군은 러시아군 포로에 대해 국제조약에 따른 '인도적인' 처우를 다했으며,  사망자에 대해서는 육군묘지 안에 묘비를 세우고 후하게 안장했다고 합니다. 윤봉길의 유해를 암장하고 방치한 것과는 달리 현재도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죠..

현재 가나자와시 한국어판 홈페이지에는 노다야마 묘지에 대한 설명에 윤봉길의사가 묻혀있었다는 내용이 실려있으며 지속적인 관리로 보존상태가 양호합니다.

 

또한 순국 기념비는 대한민국 방향으로 향해 세워졌다고해요 (ㅠㅠ) 또한 만들어진것은 일본이 아니라 서울에서 제작한 뒤에 부산을 거쳐 배를통해 일본 가나자와로 왔다고합니다.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역시나 기념비 주변에 낙엽들이나 풀들을 좀 정리한뒤에, 순국기념비를 방문한 사람들이 작성할 수 있는 방명록이 준비되어있다는 팻말을 보고, 조심스럽게 철통방어가 된듯 튼튼한 무을 열어보니 끼익- 소리와함께  촛불, 펜과 팜플렛, 그리고 방명록 등등의 물건들이 보였어요.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자신의 이름과 주소 등을 기록하는 남편. 저도 따라 이름과 날짜 등을 기록했고 정말 많은 분들의 방명록도 볼수 있었습니다.

따로 메세지를 쓰는 공간이라기보다는 방문자의 이름과 간추린 주소, 직업 등을 기록할 수 있었어요.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순국 기념비 방문한 가나자와한일부부

2012년 정도에 윤봉길의사의 순국 기념비에 정체모를 말뚝 테러를 당한적이있는것,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고계실거예요.

순국 기념비를 뒤로하고 빛나는 사각 철판? 동? 위에 새겨진 글자들 위로 이건 누군가가 실수로 했다고는 이야기될 수 없는 아주 강한 힘이 가해져야 가능한 흠집이 예전부터 늘 거슬렸었습니다. 어리석은 일부 일본인의 짓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고, 남편역시 일본인이 저지른 짓이라고 예측된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아꼈죠.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2015년도에 찍힌 사진역시 이 흠집이 고스란히 보여지고있어 적어도 4년이상 된 흠집이라고 생각됩니다. 누군지모르겠지만 대대손손 벌받을거라고 확신합니다.

이 게시물을 준비하다보니, 마음이 술렁이고 머릿속으로 정리가 안되어서 계속해서 미뤄오다가 광복절을 기점으로 업데이트 할 예정이었습니다만. 어제 다녀온 2번째 방문 기록과 함께 금일 블로그에 포스팅 하게되었네요.

3번째 방문때에는  암장지에 이어 기념비까지의 쉽게 찾는 맵을 그려와보고싶어요.그리고 지난번과 이번까지 방문하지 못했었던  박인조 선생님의 묘도 찾아뵙고싶습니다.

728x90
반응형
  • 가나자와 3년째 살고 있는 한국인 가족입니다.
    세세하고 감동있는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 데려가 보여주려 합니다.

    김**
    • 2020.02.24 15:48
    • 안녕하세요!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가나자와에 살고계시다니 너무 반갑습니다~ 여름에 가실때에는 모기가 정말 많으니, 선선한 계절에 가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조심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

  • 작년 가나자와 자료를 찾다가
    윤봉길 선생님의 암장지 포스트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었는데
    다시 다녀오셨네요.
    쉽지 않은 일이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그 이후로 선생으로서 이런 역사를 알지 못할 학생들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윤**
    • 2020.04.26 17:35
    • 안녕하세요 ! 코멘트에 답변을 늦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메세지 감사합니다.
      타향살이를 하다보니, 조금씩 역사에대해 되돌아보는 계기들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노력하고 싶어요 ☺️ 올바른 역사를 알리시느라 수고 많으십니다. 언제나 행복하세요 🌿

myoskin